나 응급실 오래 있었거든. 그래서 사람 볼 때 좀 냉정한 편임. 좋게 말하면 현실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정 없다 소리 듣는 스타일. 예전에 1년 좀 넘게 만난 남자가 있었는데 초반에는 진짜 괜찮았음. 말도 다정하고, 데리러도 자주 오고, 내가 야간 끝나고 퉁퉁 부은 얼굴로 나가도 커피 들고 기다리고 있고. 그런 거에 좀 흔들렸지 ㅋㅋ

근데 연애가 좀 길어지니까 슬슬 본심이 보이더라. 내가 응급실 일 힘들다고 하면 처음엔 고생한다 했는데, 나중엔 또 그 얘기야? 이런 표정이 나옴. 대놓고 말은 안 해도 사람 지치는 게 느껴지잖아. 결정적이었던 건 내가 보호자한테 심하게 치이고 와서 집 앞에서 엉엉 운 적 있었는데, 위로하다가 갑자기 자기는 결혼하면 애는 빨리 갖고 싶다 얘기를 꺼낸 거임. 진짜 뜬금없이.

그 순간 뭐랄까, 아 얘는 내가 사람으로 힘든 건 별로 안 중요하고 그냥 자기 인생 계획표에 맞는 여자 찾는구나 싶었음. 내가 지금 무슨 상태인지도 못 보는데 무슨 결혼 타령이야 싶더라. 애 낳고 언제까지 일할 거냐, 야간 계속 할 거냐, 엄마가 애 봐줄 수 있냐 이런 말 이어지는데 정이 뚝 떨어짐. 사랑해서 같이 살고 싶은 게 아니라 조건표 맞추는 면접 보는 느낌? 그게 너무 싫었음.

그래서 며칠 고민하다가 내가 먼저 끝냈다. 아깝긴 했지. 나이도 있고, 주변에서는 그 정도면 괜찮은 남자 아니냐고 했거든. 근데 나는 그런 식으로는 못 감. 평소엔 나 좋다 좋다 하다가 내가 제일 약한 순간에 자기 미래 계산부터 하는 사람인데, 결혼하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 같더라. 이런 촉은 이상하게 안 틀림 ㅠㅠ

그 뒤로 연애할 때 제일 먼저 보는 게 말 예쁘게 하는 거 아님. 내가 망가진 날에도 사람 취급 해주는지 그거 봄. 좋은 척, 배려하는 척은 초반에 다 함. 근데 진짜는 상대 컨디션 바닥일 때 나오더라. 나는 이제 설레는 것보다 그게 더 중요함. 좀 삭막해 보여도 어쩔 수 없음. 내 인생인데 뭐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