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회사 연구실에서 수년간 공들인 신약 후보물질이 임상시험 막바지 단계에서 예상치 못한 간독성이나 심장 부작용으로 개발이 중단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최근 국내외 제약·바이오 업계에서는 인공지능을 활용해 신약 개발 초기 단계부터 독성과 부작용 가능성을 예측하는 기술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개발 속도를 높이는 동시에 실패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신약 하나가 시장에 나오기까지는 통상 십 년 안팎의 시간과 막대한 비용이 든다. 이 과정에서 후보물질 상당수는 독성 문제로 개발 단계를 넘지 못하고 탈락한다. 특히 동물실험과 임상시험 단계에 들어선 뒤에야 부작용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아, 그동안 투입된 시간과 비용이 고스란히 손실로 이어지는 일이 반복돼 왔다.
이런 문제를 줄이기 위해 연구진은 화학구조와 분자 특성, 기존 독성 데이터베이스를 학습한 인공지능 모델을 활용하고 있다. 후보물질의 분자 구조를 입력하면 간독성, 심장독성, 신경계 부작용 등이 나타날 가능성을 수치로 예측해주는 방식이다. 방대한 화합물 중 위험도가 높은 물질을 미리 걸러내는 일종의 사전 선별 작업인 셈이다.
국내외 제약사와 연구기관은 이 같은 인공지능 예측 모델을 신약 개발 초기 스크리닝 단계에 도입하고 있다. 수만 개에 이르는 후보물질을 실험실에서 일일이 검증하기 전에 인공지능이 먼저 위험도를 평가해, 연구진이 상대적으로 안전성이 높은 물질에 자원을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구조다.

AI가 화합물 독성 위험도를 사전에 분석 [그림=메디닉스DB]
이 방식의 가장 큰 장점은 동물실험 단계에 들어가기 전 위험물질을 걸러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실험동물 사용을 줄이고, 불필요한 실험에 드는 시간과 비용도 절감할 수 있다는 것이 관련 연구진의 설명이다. 개발 초기에 실패 가능성이 큰 물질을 조기에 정리하면 전체 개발 기간 단축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를 비롯한 규제기관들도 인공지능 기반 독성 예측 기술의 신뢰성을 검증하기 위한 지침과 평가 체계를 마련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예측 모델이 실제 임상 결과와 얼마나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절차가 마련돼야 이 기술이 신약 허가 심사 과정에서도 참고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만 전문가들은 인공지능 예측 결과를 그대로 신뢰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학습된 데이터의 범위를 벗어난 새로운 구조의 물질에 대해서는 예측 정확도가 떨어질 수 있고, 예측되지 않은 부작용이 임상시험 단계에서 뒤늦게 발견될 가능성도 여전히 남아 있다. 인공지능은 보조 도구일 뿐 동물실험과 임상시험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것이 학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예측 정확도 검증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 [그림=메디닉스DB]
국내에서는 관련 학회와 바이오벤처를 중심으로 인공지능 독성 예측 알고리즘을 고도화하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정부 차원의 연구개발 지원도 점차 확대되는 추세다. 축적된 국내 임상·비임상 데이터를 인공지능 학습에 활용해 예측 정확도를 높이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 기술이 자리를 잡으면 신약 개발 기간과 비용을 동시에 줄이는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개발 초기 단계에서 위험한 후보물질을 정리할수록 후속 단계에 투입되는 자원의 효율이 높아지고, 이는 결국 제약산업 전체의 경쟁력 강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환자와 소비자 입장에서도 이 같은 변화는 무관하지 않다. 부작용 위험이 낮은 후보물질이 개발 초기부터 선별되면 임상시험 참여자의 안전성이 높아지고, 궁극적으로는 더 안전한 신약이 시장에 더 빨리 공급될 가능성도 커진다.
새로운 치료제의 임상시험 참여를 고려하는 환자라면 해당 약물의 개발 단계와 안전성 검토 절차를 담당 의료진에게 충분히 확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시판 중인 의약품이라도 낯선 부작용이 나타나면 자가 판단으로 복용을 지속하기보다 즉시 의료기관을 찾아 상담받는 것이 안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