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통과 설사 같은 증상이 사라져 염증성 장질환이 안정된 상태로 보이더라도 장 점막에서는 질환과 관련된 변화가 계속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향후 크론병과 궤양성대장염 환자의 재발 위험을 보다 일찍 파악하는 단서가 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인다.
호주 월터앤엘리자홀의학연구소 WEHI와 로열멜버른병원 공동 연구진은 염증성 장질환 환자와 비환자의 장 조직을 분석한 결과, 환자의 장 상피세포에서 비정상적인 세포 사멸 신호가 나타나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연구 결과는 8월 27일 국제학술지 Science에 게재됐다.
염증성 장질환은 장에 만성적인 염증이 생기는 질환으로 대표적으로 크론병과 궤양성대장염이 포함된다. 설사와 복통, 혈변, 피로감, 체중 감소 등이 나타날 수 있으며 증상이 악화되는 활동기와 비교적 안정된 관해기가 반복되는 특성이 있다. 크론병은 입부터 항문까지 소화관 어느 부위에서나 발생할 수 있는 반면 궤양성대장염은 주로 대장과 직장 점막에 염증과 궤양이 발생한다.
연구진은 염증성 장질환 환자와 대조군으로부터 확보한 900여 개의 장 조직 샘플을 분석했다. 특히 겉으로 염증이 뚜렷하지 않은 조직에서도 세포가 비정상적으로 죽는 과정과 관련된 신호가 발견됐다. 이는 장 세포의 손상이 심한 염증이 발생한 뒤 나타나는 결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질환 진행 과정의 비교적 초기부터 관여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연구에서 주목된 것은 네크롭토시스와 아포토시스로 불리는 세포 사멸 과정이다. 장에 염증 신호가 발생하면 장벽을 구성하는 상피세포가 변화하고 이후 세포 사멸 경로가 활성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장 점막을 계속 재생해야 하는 장 줄기세포까지 영향을 받을 가능성도 확인됐다. 이러한 변화가 반복되면 장벽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기능에도 부담이 될 수 있다.
더 중요한 부분은 증상이 잘 조절되는 환자에서도 이 신호가 관찰됐다는 점이다. 연구진이 환자를 2년 이상 추적한 결과 장 조직에서 비정상적인 세포 사멸 신호가 높은 사람은 이후 질환이 다시 활성화되는 경향이 더 높았다. 현재 검사에서 염증이 안정돼 보이더라도 분자 수준에서는 질환과 관련된 변화가 남아 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만 이번 연구 결과만으로 환자의 재발 시기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연구에서 확인한 분자 신호는 아직 일반 의료기관에서 사용하는 표준 검사법이 아니며 추가 임상 연구와 검증이 필요하다. 현재 염증성 장질환은 환자의 증상과 혈액검사, 대변검사, 내시경 및 조직검사, 영상검사 등을 종합해 진단하고 질환의 상태를 평가한다.
환자 입장에서는 증상이 좋아졌다고 임의로 약을 중단하거나 정기 검사를 미루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지속되는 설사와 반복되는 복통, 혈변이나 점액변, 특별한 이유 없는 체중 감소가 나타난다면 단순 장염이나 과민성장증후군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의료기관에서 원인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염증성 장질환은 과민성장증후군과 증상이 일부 비슷하지만 실제 장의 만성 염증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질환이다.
이번 연구는 염증성 장질환 관리의 목표가 단순히 복통과 설사를 없애는 수준을 넘어 장 점막과 세포 수준에서 질환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억제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향후 이러한 분자 신호가 실제 재발 예측검사로 발전한다면 환자별 치료 강도와 추적검사 시기를 보다 정밀하게 결정하는 데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