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병원 내과 전공의로 일한 지 좀 됐는데도, 아직도 어떤 날은 이 생활이 사람을 조금씩 닳게 만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응급실에서 콜 올라오고, 병동에서 보호자 설명 잡히고, 외래에서 밀린 환자 보고 나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쁜 건 원래 각오했던 부분인데, 힘든 건 몸보다 머리가 계속 긴장 상태로 남아 있다는 점이더라고요. 퇴근하고 집에 가서도 오늘 놓친 거 없나, 그 환자 수치 다시 봐야 하나, 그 말투가 너무 차갑진 않았나 그런 생각이 계속 맴돕니다.
얼마 전에는 당직 끝나고 편의점 앞에서 한참 서 있었습니다. 뭐 사러 들어간 건지, 집에 가는 길이 맞는지도 순간 헷갈릴 정도로 멍하더라고요. 그날 밤에는 환자 상태가 급격히 변한 것도 있었고, 보호자분이 감정적으로 쏟아내시는 말도 다 받아내야 했습니다. 솔직히 그분들이 힘드신 건 너무 잘 압니다. 그런데 이해하는 거랑 버텨지는 거는 또 다르더라고요. 그 와중에 선배한테는 왜 미리 판단 못 했냐는 말 듣고, 후배는 저만 쳐다보고 있고, 저는 중간에서 그냥 계속 굴러가야 하는 톱니 같았습니다.
가끔은 제일 무서운 게, 이런 날이 반복되다 보면 웬만한 일에 놀라지도 않고, 누가 울어도 마음이 바로 못 따라간다는 점입니다. 원래는 환자 한 분 한 분한테 더 신경 쓰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바쁘다는 이유로 점점 자동응답처럼 움직이는 제 모습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번아웃이 온 건가 싶다가도, 다들 비슷하게 사니까 그냥 내가 약한 건가 싶기도 하고요. 쉬면 좀 나아질 수 있어요 같은 말이 맞을 수도 있는데, 현실은 쉬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아서 더 답답합니다.
익명이라 적어보는데, 여기 계신 분들은 이런 순간 어떻게 넘기셨나요. 그냥 지나가면 괜찮아졌는지, 아니면 진짜로 한 번 멈추는 게 도움이 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요즘은 큰일 없이 하루 끝나도 하나도 안 기쁘고 그냥 또 버텼다는 생각만 들어서요. 저만 이런 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