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 들어올 때는 그냥 버티면 길이 보일 줄 알았어요. 전공의만 끝내면 그래도 사람답게 살겠지 싶었고요. 근데 막상 내과에서 몇 년 굴러보니까, 힘든 건 수련 자체보다 그 다음이 더 막막하더라고요. 페이닥터 자리 알아보는 순간부터 갑자기 내가 숫자로만 보이는 느낌이 좀 세게 왔습니다.
주변에서는 대학 남아라, 펠로우 해라, 개원 생각해라 말 많은데 정작 그 말 해주는 사람 중에 제 생활 책임져주는 사람은 없잖아요 ㅋㅋ 당직 얼마나 서는지, 월급이 세후로 어느 정도인지, 사람 빠지면 공백을 누가 메우는지 이런 건 끝까지 흐리게 말하는 곳도 많았어요. 면접 비슷하게 얘기하러 가면 “분위기 좋다”는 말은 꼭 하는데, 그런 데일수록 스케줄표 받아보면 한숨부터 나옵니다.
저는 한 번은 진짜 거의 갈 뻔한 자리 있었는데, 조건표 다시 보내달라고 몇 번 확인하다가 접었어요. 처음 말이랑 나중 말이 계속 달라졌거든요. 야간 부담 적다더니 알고 보니 콜은 상시고, 주말도 로테이션이라는데 사실상 고정에 가깝고. 이런 거 따지면 예민한 사람 취급받는데, 안 따지면 나중에 내가 다 뒤집어쓰는 구조예요. 병원은 늘 급하고, 사람은 부족하고, 그 사이에서 제일 만만한 사람이 면허 가진 젊은 의사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되게 단순하게 봅니다. 이름값보다 근무표, 사람 말보다 계약서요. 배울 만큼 배웠다는 생각 드는 순간부터는 더더욱요. 사명감 얘기 꺼내는 곳도 많은데, 그 말로 빈자리 메우는 데 익숙한 데가 진짜 많습니다. 좀 씁쓸해도 이 바닥은 결국 내가 안 챙기면 아무도 안 챙겨줘요. 전 그걸 좀 늦게 배웠네요 ㅠㅠ
